[중앙일보] “한국 기초과학, 세계 변방 벗어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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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변방에 머물러 온 한국 기초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노벨상 사관학교’로 불리는 독일 막스플랑크의 한국연구소 유치 실무를 맡은 포스텍(포항공대) 김승환(51·물리학) 교수의 말이다. 김 교수는 “탁월성을 추구하는 막스플랑크의 시스템이 정착되면 한국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는 길도 열릴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포스텍은 막스플랑크재단과 공동으로 한국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막스플랑크의 해외 연구소는 미국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달 27일 경북 포항시 효자동 포스텍에 입주한 아시아태평양 이론물리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막스플랑크의 한국연구소는 어떤 방식으로 설립되나.
“두 연구소가 공동으로 2015년까지 박사급 연구원 200여 명으로 소재 분야 연구소를 세울 예정이다. 그 전 단계로 올 7월 ‘아토초과학’과 ‘복합소재’ 두 개 센터를 포스텍에 설립해 9월부터 공동연구를 시작한다. 현재 막스플랑크에 없는 새로운 분야다. 아토초과학은 포스텍 김동언 교수와 막스플랑크 양자광학연구소의 크라우츠가 맡는다. 복합소재는 포스텍 박재훈 교수와 막스플랑크 고체화학물리연구소장인 하우쳉이 끌어간다.”
-아토초과학은 생소한 분야인데.
“1초를 10억분의 1로 나누면 1나노(nano)초다. 1나노초를 다시 10억분의 1로 나눈 시간이 1아토초다. 말 그대로 찰나다. 아토초과학은 원자 간 결합과 분리를 실시간으로 관찰하는 등 신소재 개발에 필수적이다. 아토초과학을 연구하려면 포스텍이 보유한 방사광 가속기가 필수적이다. 복합소재는 꿈의 신소재를 찾는 연구다. 이런 분야에서 미래의 노벨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막스플랑크를 기초과학 분야의 세계 최고 연구소로 만든 힘은 무엇이라고 보나.
“연구는 탁월성을 추구하며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석학보다는 잠재력이 있는 젊은 연구자를 선호해 연구소장은 35∼45세가 많다. 과학자의 과학자에 의한 과학자를 위한 ‘꿈의 연구소’다. 연구 과제를 수주하고 목적에 맞춰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국내 연구소와 큰 차이가 있다.”
-막스플랑크 한국연구소 설립의 의미는.
“소재 분야만큼은 한국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인도·캐나다·아르헨티나 등도 유치에 뛰어들었다. 우리로서는 기초과학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은 응용산업화 분야는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기초과학은 SCI급 논문이 양적으로는 많아졌으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인용지수는 여전히 세계 수준에 못 미친다.”
-유치 과정에서 무엇이 막스플랑크의 결심을 끌어냈나.
“4년째 포스텍에서 일하며 아태이론물리센터를 이끌고 있는 피터 풀데(74) 소장의 역할이 컸다. 풀데 소장은 막스플랑크에 있다가 박찬모 전 포스텍 총장의 초빙으로 2007년 4월 포스텍에 왔다. 그는 1년 중 4개월을 한국에서 근무한다. 풀데 소장은 한국에 오자마자 젊은 연구자들로 주니어 리서치그룹을 만들어 막스플랑크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해 10월 막스플랑크의 피터 그루스 총재가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그루스 총재는 당시 포스텍을 둘러보고 좋은 느낌을 받았다. 포스텍은 막스플랑크처럼 대도시가 아닌 조용한 지방에 있다. 거기다 방사광 가속기와 나노집적센터 같은 첨단 연구시설, 또 대학이 한곳에 모여 있다. 더 중요한 건 젊은 연구자들의 자세였다. 그는 ‘혼이 있더라’고 표현했다. 그루스 총재는 주니어 리서치그룹에 5년간 150만유로를 투자하는 데 서명했다. 그는 포스텍을 막스플랑크의 해외 연구소로도 점찍었다. 포스텍은 그때부터 유치에 시동을 걸었다. 이듬해 7월에는 김관용 경북지사를 위원장으로 유치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추진 과정에서 피터 풀데는 문제가 생기면 자문과 촉매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은 노벨상 과학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다.
“13대 0으로 우리를 앞선다. 일본에서는 노벨상이 발표되는 11월이면 후보로 추천된 100여 명이 전화를 기다린다. 우리는 당분간 어렵다. 노벨상의 전 단계인 라스카상·울프상 등을 받은 사람조차 없다. 일본의 리켄은 1917년 막스플랑크의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소를 벤치마킹해 만들어졌다. 일본은 기초과학 육성 시스템을 독일에서 가져왔다.”
-과학 노벨상에 대한 전 국민적 갈망이 있다.
“조급증이 분명 있다. 그러나 급할수록 천천히 가라는 말도 있지 않으냐. 막스플랑크로서도 해외 연구소에서 노벨상 꽃을 피워야 한다. 최고 연구를 추구하는 게 이 연구소의 설립 취지다.”
글=포항=송의호 기자
사진=프리랜서 공정식
◆막스플랑크재단=1948년 독일에서 ‘미래를 위한 연구’를 내세워 설립됐다. 지금까지 17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재단까지 포함하면 35명에 이른다. 막스플랑크·아인슈타인·하이젠베르크 등이다. 막스플랑크재단은 소속 과학자만 1만2000여 명에 예산은 연간 14억 유로(약 3조6000억원)에 이른다. 독일을 중심으로 80여 개 연구소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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